토마스는 근무 내내 단 한숨도 쉬지 못하고 진로와 환자들에게 시달린 만큼 피곤해진 눈을 안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비비었다. 하아… 빨리 집에 가서 맥주 한 캔을 몸 안으로 쏟아내고 야구시청을 하면 이 피로감도 풀릴 텐데……. 근무를 할 때마다 쓰는 안경은 잠시 내려둔 채 등받이 의자에 목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던 토마스는 방금 전 다녀갔던 동양인 남자의 얼굴이 떠올리자 곧 얼굴을 붉히며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꽤나 저의 취향이었지.
오후 늦게 방문한 남자는 등에 어린 동생을 업고 진료실로 들어섰다. 괴로운 숨을 토해내며 심하게 기침을 하던 동생은 요즘 유행하는 독감에 걸려있었고, 그 남자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제 동생을 괴로운 듯 내려다보았다. 고열로 끙끙 앓던 아이는 주사를 맞고서야 조금은 편안해진 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고열로 시달리는 아이보다 그 아이의 형이, 정확히는 접혀 올라간 소매 끝 사이로 보이는 팔뚝이라거나, 아이를 업고 뛰어오느라 약간은 헐떡이는 숨, 그리고 열과 땀으로 몸에 달라붙은 와이셔츠가 신경 쓰였다. 그러다 살짝만 눈을 위로 올리면… 이런… 저를 내려다보고있던 새까만 두 눈과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바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까지 떠올린 토마스는 아무도 없는 진료실에서 마치 제 생각을 누가 읽기다로 한 듯 깜짝 놀라며 열이 올랐다. 열이 오른 목 뒤로 두 손을 얹고 얼굴을 바짝 내린 토마스는 환자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이다니 의사로서 실격이라 생각하며 끙끙 거렸다.-정확히는 제 취향의 남자 앞에서 프로패셔널한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쪽팔려하고 있었다- 그 남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다행히도 토마스는 곧 그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운동을 많이 했는지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 새까만 머리에 까만 눈까지 토마스의 모든 신경세포가 그 남자가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보름 전 왔던 동양인 남자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느즈막히 진료실을 방문했다. 흘끗 컴퓨터 너머로 전송된 진료차트를 보니 ‘Min-ho Park’ 이라 쓰여진 이름이 토마스의 두 눈에 각인되듯 새겨졌다. 토마스는 입 안으로 그의 이름을 굴려보았다. 민호, 이름이 민호구나. 둥굴게 넘어가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 토마스는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입 안으로 굴려보며 민호를 마주 보았다.(사실 그렇게라도 다른 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긴장되어 달달 떨리는 온 몸이 느껴져 신경을 분산시키고자 노력한, 어찌 보면 발악이기도 했다.)
“오, 크흠,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토마스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삑사리 난 제 목을 어루만지며 마주 보는 눈을 피했다. 젠장. 저가 얼마나 바보같이 느껴졌을까. 트롤만큼이나 멍청하게 느껴지는 제 자신이 싫어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은 빤히 쳐다보지 않네요?”
“!!!”
토마스는 마치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을 들킨 냥 깜짝 놀라며 민호를 쳐다보았다. 토마스의 두 눈에 비친 민호는, 놀랍게도 웃고 있었다. 정말로 아픈지 -병원에 오려면 아픈 게 당연함에도 토마스는 잠깐, 아주 잠깐 혹시나 저를 만나러 온 건 아닐까 설레발을 쳤다- 살짝 열이 오른 얼굴로 토마스를 마주 보며 눈 꼬리가 쳐지도록 두 눈을 휜 얼굴이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토마스의 눈에는 야살스러워 보였다. 위험해. 아픈 몸에 열이 올라 눈 밑이 살짝 벌게진 두 눈과 다른 방면으로 열이 오른 두 눈이 마주 보는 감각은 어딘가 모르게 야하게 느껴져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민호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눈이 열로 인해 멍해 더 야하게 느껴졌다. 열로 인해 벌게진 얼굴, 단추가 두 개 정도 풀린 셔츠 사이로 민호의 목과 그 아래의 속살을 토마스는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좀 더 시선을 올리니 살짝 벌린 민호의 입술 새로 곧 저의 이름이 나올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토마스는 다시 살짝 시선을 옮겨 민호를 새기다시피 했다. 토마스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꿀꺽 소리가 났다. 이대로…
“이봐요.”
민호가 눈을 깜빡이며 토마스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토마스는 마법과도 같았던 순간에서 깨어났다. 토마스를 빤히 쳐다보던 민호는 알만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치켜세웠다.
“환자를 앞에 두고 언제까지 아무 말도 안 할건데요?”
“어, 그러니깐… 어,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민호의 일침에 아까와는 달리 창피함과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는 토마스는 그제야 더듬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간단한 물음과 답변을 주고받을수록 토마스의 눈은 직업정신을 살려 의사의 눈이 되었고, 민호는 제 앞에서 똘추처럼 굴던 의사가 저를 마주보며 -불쌍하게도 눈을 똑바로 맞추지는 못했다- 제법 진지하게 의사가 할 법한 말들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진료 결과, 민호는 감기몸살이라 판명 났고 민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쉬지 못하셨나봐요.”
토마스가 제게 말 걸 줄은 몰랐던 민호는 살짝 놀란 눈으로 토마스를 바라봤다. 이런 얘길 생판 처음 본 사람에게 해도 되는 걸까 싶다가도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인데 뭐 어떠냐 싶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호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게 이어졌으며 토마스는 민호가 말을 꺼내는 동안 내내 맞장구를 쳐주었다. 지루할 법 한데도 -민호의 이야기의 대부분이 야근을 밥 먹듯 시키는 상사와 제 빌어먹을 근무 상황을 욕하는 것 이었다. 놀랍게도 -토마스는 운명이라 여겼는데- 민호는 토마스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런 내색 없이 민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준다거나 같이 상사 욕을 해주는 토마스는 좋은 청자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민호에게 있어 토마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멍청한 똘추인 줄 알았는데… 제법, 아니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이다.
***
그 이후로 토마스는 민호의 출근시간에 맞춰 좀 더 일찍 출근을 해가며 점심시간과 함께 민호의 회사 근처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버스 두 정거장 전에 미리 내려 병원까지 걸어가고, 점심을 그 근처 창이 뻥 뚫린 카페테리아에서 먹으며 혹여나 민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극정성이었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료 의사이자 친구인 테리사는 그런 토마스를 보며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누군지 몰라도 저 녀석 레이더망에 걸리다니 불쌍하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렇게 스토커질 아닌 스토커질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토마스의 상대 없는 스토커질도 끝이 났다.
토마스가 민호와 마주친 건 출근길에서도, 점심시간이면 가던 민호 회사 근처의 카페테리아에서도 아니었다. 주말,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 오랜만에 민호와 마주쳤건만 민호는 여자와 있었다. 것도 토마스가 보기에도 제법 예쁘게 생긴 민호와 같은 동양계 여자랑.
먼저 발견한 건 역시나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충격에 빠져 민호의 팔에 팔짱을 낀 여자의 팔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맞은편에서의 시선을 느낀 민호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토마스는 저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던 민호를 뒤로 한 채 등 돌아 그대로 뛰어갔다. 민호가 그 여자와 팔짱을 낀 채 그 여자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던 것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저와 민호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건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진실로- 혼자 보고 싶어 하고,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기대하던 저 스스로가 마치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 했다. 이게 만약 TV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라면 남주인공(민호)이 약녀-이미 토마스의 시점에서 그녀는 악녀가 된 듯하다-를 뒤로 두고 여주인공(토마스 제 자신)을 쫓아 뛰어올 텐데… 불행하게도 토마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토마스는, 그렇게 시작도 못해본 제 사랑도 끝이 난 줄 알았다.
***
방금 무슨 일이 일어 난거지? 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꽤나 당황스러웠다. 미국으로 유학 온 사촌동생이 오랜만에 기숙사를 벗어나 저를 만나러 왔기에 못 사주었던 대입 선물도 사줄 겸-미국은 한국과 달리 9월에 첫 학기가 시작 된다- 백화점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방금, 내가… 뭘 본 게 뭐지? 옆에서 동생, 랑이, 가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지만 민호의 귀에 랑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설마…, 여자 친구로 착각한 건가 싶어 슬며시 제 동생을 내려다보자 저의 말을 안 듣고 있었던 것을 눈치 챘는지 심통이 난 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이 꼬맹이랑 나를……? 민호는 골치 아프게 됐다싶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우우… 뭐야, 감자. 왜 자꾸 나 무시하는데?”
성인이면 다 컸지만 제 눈에는 아직도 마냥 어린 동생을 내려다보며 이마에 땅콩을 먹였다.
“까분다. 내가 감자라 부르지 말랬지?”
“으으…오빠가 자꾸 날 무시하니깐 그렇지!”
“그냥…”
“그냥?”
“꽤 호감 가던 사람이 너랑 있는 걸 봤는데, 내 여자 친구인 줄 오해했나봐. 인사도 무시하고 그냥 가버리네.”
랑은 민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사람이 있었나? 민호는 어린애한테 무슨 말을 하나싶어 잠시 멈췄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고, 랑은 그런 제 오빠를 따라 쪼르르 쫓아왔다.
“그냥 오해라고 말하면 안돼?”
“그러기 뭐한 상황이야.”
“뭐야, 그게…….”
랑이가 옆에서 궁시렁 거리는 것을 느끼며 민호는 아까 그렇게 충격 받은 눈으로 뒤 돌아 뛰어가던 토마스를 다시 떠올렸다. 사실, 토마스가 모르는 게 있다면 민호는 토마스가 점심시간이면 제 회사 근처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던 것을 알고 있었다. 토마스가 민호를 보러 앉아있던 카페테리아가 창이 뚫려있는데다, 민호의 사무실에서 정면으로 내려다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민호와 토마스의 점심시간은 30분 간격을 두고 달랐는 데, 처음엔 저 남자가 왜 저기 있지 싶었다. 곧 민호는 그 남자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저와 비슷한 키와 체격을 가진 남자가 지나갈 때면 고개를 빼고 쳐다보는 토마스의 행동 때문이었다. 처음엔 무시하다가도 민호는 매일같이 찾아와 항상 같은 행동을 하는 토마스를 신기한 양 쳐다보았고, 이제는 그런 토마스를 받힌 손에 고개를 묻은 채 귀엽다고 생각하며 지켜 보곤했다.
“좋아하는거 아냐?”
“…뭐?”
토마스 생각을 하고 있던 민호는 반 박자 느리게 랑의 물음에 답을 했다.
“좋아하는 거 아니냐구. 오빠가, 그 여자를.”
랑은 친절하게 이번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여자는 아니지만… 좋아한다고? 내가? 그 바보같은 똘추를……? 아니, 제법 귀엽다고는 생각했지만… 내가?
그제야 저의 감정을 눈치 챈 민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망했다. 민호의 양 귀가 벌게진 게 랑의 눈에도 확연하게 보였다.